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소비에트의 서방 공세 (문단 편집) === 라트비아 방면 === || [[파일:1280px-Latvian_Independence_War_1919.03.06.svg.png|width=100%]]|| || 1919년 3월 6일 당시 라트비아 독립전쟁의 전세. '''[[핑크색]]이 붉은 군대가 점령한 곳이다.''' || 라트비아는 에스토니아와 달리 실제로 수도를 빼앗기고 나라가 멸망 직전으로 몰렸다. 1918년 12월 1일 볼셰비키는 라트비아를 침공했다. 당시 라트비아 침공군은 대부분 붉은 라트비아인 소총병(Red Latvian Riflemen)이라 불리는 라트비아인 붉은 군대 장병들이었다. 때문에 침공은 더욱 쉽게 진행되었고 라트비아 대부분은 별다른 저항 없이 볼셰비키의 수중에 넘어갔다. 북부에서는 12월 7일 알룩스네, 18일 발카, 23일 체시스가 점령되었고, 남부에서는 9일 [[다우가우필스]], 17일 플랴비냐스가 점령되었다. 수도 [[리가]]는 이듬해 1919년 1월 3일 점령되었고 13일 [[라트비아 사회주의 소비에트 공화국]]이 선포되었다. 물론 에스토니아 코뮌처럼 이 라트비아 SSR도 볼셰비키의 지령을 받는 괴뢰정권이었다. 1월 15일 붉은 군대의 공세에 무력하게 털리던 라트비아는 리엘라우체에서 최초로 적군의 진격을 막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라트비아와 연합한 독일군이 아우체에서 패하는 바람에 또다시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달 말 라트비아 임시정부와 잔여 독일군부대는 라트비아 서단의 [[리에파야]]로 후퇴하였고 라트비아-볼셰비키 전선은 벤타 강에서 안정화되었다. 22일 붉은 군대는 벤타 강변에 교두보를 형성하여 스크룬다를 점령했으나 29일 라트비아군의 반격에 밀려 교두보를 다시 내주고 패배했다. 이후 붉은 군대의 공세는 중단되었다. 라트비아는 2월 중순 반격을 개시했다. 정부는 18일 에스토니아와 협정을 체결하여 에스토니아 영내에서 북부라트비아인여단을 창설했다. 3월 3일 라트비아-독일 연합군이 붉은 라트비아인을 상대로 반격을 개시했다. 15일 투쿰스가, 18일 옐가바가 볼셰비키로부터 해방되었다. 그러나 4월 16일 발트 3국의 지배를 획책한 [[발트 독일인]] 귀족들이 리에파야에서 쿠데타를 일으켜 임시정부를 내쫓고 괴뢰정부를 수립했다. 임시정부는 리에파야 항구에 정박한 영국 해군의 함선으로 피신하였다. 5월 22일 리가는 [[자유군단]]에 점령되었고 이후 대대적으로 진행된 '''빨갱이 사냥'''으로 최소 174명에서 최대 5천명이 사살되었다. 이후로도 자유군단과 독일계 부대는 독일인의 현지 지배를 목적으로 깽판을 부리다가 [[https://en.wikipedia.org/wiki/Battle_of_C%C4%93sis_(1919)|체시스 전투]]에서 에스토니아-라트비아 연합군에 [[참교육]]을 당하고 [[협상국]]의 개입 하에 라트비아 영내에서 철수했다. 이후 라트비아는 남쪽에서 밀고 올라온 [[폴란드 제2공화국]]과 협력하여 남동부 다우가우필스를 해방하고 1920년 8월 11일 [[https://en.wikipedia.org/wiki/Latvian%E2%80%93Soviet_Peace_Treaty|리가 조약]][* 1921년 3월 체결된 [[리가 조약]]과 다르다.]을 체결하여 독립을 인정받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